많은 사람들은 물리학이나 화학에 대해 생각할 때 조작주의 필요성
을 이해한다. 만일 과학자가 특정 유형의 화학반응이나 에너지 또는
자성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면, 그것들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불행하게도 심리학에 대해서 생각하고
논의할 때는 조작주의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십상이다. 심리학
용어들도 직접이든 간접이든 과학 이론에서 유용한 설명적 구성체
가 되기 위해서는 조작적으로 정의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어째서 똑같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인가?
한 가지 이유는 심리학에서 사전편향 문제라고 불러왔던 문제 때문이다.
사람들은 지질학을 공부할 때 바위의 본질에 대한 오래된 정서적 신념을
가지고 접근하지 않는다. 그러나 심리학에서는 상황이 아주 다르다 우리는
일생에 걸쳐 스스로에게 인간 행동에 관한 "설명"을 해왔기 때문에
모든 개인 심리학 이론들도 이론적 개념들을 포함하고 있다(예컨대,
총명하다, 공격적이다, 불안하다 등등). 따라서 우리가 다른 정의를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의아해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비록
이해라 과화적 진보에 있어서는 철저한 장해물이며, 심리학에 대하여
일반대중이 겪는 많은 혼란의 원인이기도 하다.
일반인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가장 큰 원천 중의 하나이며 대중매
체를 통해 심리학의 연구결과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방해가 되는
가장 큰 장해물 중의 하나는 심리학의 많은 기술적 개념들 일상 언어에서
사용하는 단어들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일상 용법이 광범위한
오해의 여지를 제공한다. 심리학자들이 지능, 불안, 공격성, 그리고 애착
등의 용어를 이론적 구성체로 사용할 때, 그 단어들은 반드시 일반대중이
의미하는 것과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점의 본질은 조작주의에 관한 앞서의 논의로부터 명백해진다.
지능이나 불안과 같은 용어들을 심리학 이론에서 사용할 때 이들의
흔히 이러한 정의는 매우 기술적이고, 일반적으로 상당히 세부적이며,
많은 측면에서 일반대중의 용법과는 차이를 보이기 십상이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은 "인지 성과 목록의 큰 표집에 대한 요인분석에
서의 일차 주성분"이라는 구절을 들었을 때, 이것을 이론적 구성체인
"지능"의 조작적 정의로 인식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우울이란 용어가 일반대중의 용법에서는 "기분이 좋지
않아서 축 쳐진 느낌"과 같은 것을 의미하여 왔다. 반면에 우울증의
기술적 정의는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과는 엄청나게 다른 의미를 갖는다. 임상심
학자의 우울은 일반인의 우울과는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과학들도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하지만, 심리학처럼 심각한 것은 아니다.
"생명" 개념에 관한 앞선 논의를 회상해 보라. 메더워와 메더워가 지적하는 것처럼,
"문제는 '생명'이라는 용어를 다른 표현에서 나타나는 맥락과는 전혀 거리가 먼 과학적
맥락에서 사용한다 는대 있다."
물리학자 리사 랜달은 어떻게 이 문제가 일반대중의 물리학 이해를 손상시키는 것인지를
논의한다. 그녀는 아인슈타인 이론에서 상대성이라는 용어를 일반대중이 "모든 것은 상대적"이
기 때문에 과학에는 절대적인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로 아인슈타인 이론이 불변소와 절대소에 관한 것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더라면 더 적절하였을
것임을 인정하였지만, 상대성이라는 용어가 너무나도 신속하게 자리를 잡고 말았다. 계속
해서 랜달은 과학자들이 때때로 일상적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가
일반인에게 불명확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심리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심리학자와 일반인이 동일한 단어를 상이한 의미로 사용할 때, 서로 오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만일 심리학자적 구성체를 나타내는 새로운 용어들을 만들어 사용하였더라면 그러한 용어들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는 그러한 용어들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물리학자들이 에르그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리학자들도 부조화와
같은 용어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이 용어들을 새롭게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흔히 사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혼란이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적다.
일반인 은 이렇게 항의할 수 있다 : "그렇다면 왜 심리학자들은 이 용어 들을 우리에게 강요합니까?
새로운 전문용어, 지극히 기술적인 정의, 단어의 비일상적 용법들 말입니다. 왜 그것들이 필요한 것이죠?
어째서 내가 생각하는 '지능'은 받아들일 수 있는 생각으로 논의할 수 없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심리학 연구에 대한 결정적인 오해, 즉 심리학 연구에
관한 대중매체의 보도에 반영되어 있기 십상인 오해의 전현적인 사례를
보도록 하자. 미국심리학회 1996년도 연차학술대회에 관한 어떤 전국
일간지 기사의 제목은 "Could you Repeat that in Kingon?"이었다.
이것은 "자기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하는 심리학자들"이라는 의미
를 담고 있다. 그 기사는 대회에서 발표한 논문의 다음과 같은 제목을
조롱하는 것이었다.
기자는 그 제목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감히 생각해 볼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제대로
훈련받은 거의 모든 심리학자들은 그 제목이 지능검사 이론에서의 발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다.
실제로도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지능일론에서 기술적 발달을 거듭한 이론이다. 기자가 이 개념을 예전에 들어보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것은 기자가 소립자 물리학자들이 가장 최근에 확인해낸 기본 입자에 관한 세부사항들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기술적 용어에 대한 기자의 무지(지극히
이해할 수 있는 만한 무지)가 현대심리학에게는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주제가
물리학일 때는 아마도 기자들이 자신의 무지가 이해를 가로막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주제가 심리학일 때는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마치 심리학자 때문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제 우리는 문제의 핵심에 들어왔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은 앞선 논의에서의 요점, 즉 조작의
라는 생각이 심리학에만 특수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과학의 특징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조작주의의 명백한 본질을 인식하고 쉽게 받아들인다. 만일 한 과학자가 방사능을
연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그녀)가 그 현상을 측정하는 관찰 가능한 방법, 즉 다른 연구자도 사용하면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야말로 과학의 정의 자질의 하나인 공개적 본질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두 명의 상이한
과학자는 동일한 조작적 정의에 동의함으로써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결과를 반복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맥락에서는 명백해 보이는 것이 심리학을 생각할 때는 그렇게 명백해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지능이나 불안과 같은 개념에 대한 조작적 정의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사람들은 모두 그러한 용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 않은가?
과학자가 알아야만 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공개적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 답은 "아니다, 결코 알지 못한다"이다. 과학자는 다른 과학자들이 정확하게 동일한 방식으로 지능을 측정
하고 그 개념에 해서, 지능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어야만" 한다. 명시성과 정확성이라는 측면에서 이것은 일반
대화에서 상식적 이해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모호하기 짝이 없는 내포적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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